花明麗月
[夢/에바/카오루] 썩어버린 사과와 멈추지 않는 시계와 세계 종말과 너와 나 본문
무더운 여름. 너를 떠올릴 때, 그 뒷배경은 항상 무더운 여름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맑은 하늘.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빛, 시끄럽게 짝을 찾아 내지르는 매미 소리. 피부에 달라붙는 습하고 눅눅한 더운 공기. 너는 어디를 보아도 여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네가 있는 풍경은 언제나 무덥디 무더운 여름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강렬하고, 뜨겁고, 잊혀지지 않는, 여름의 색이었다.
"이 세계는 미쳐있어."
그것이 너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날, 내가 너에게 건넨 말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 기억속의 너는 반팔이였으니 아마도 여름이었겠지. 아무도 없는 텅 비어버린 교실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뱉어낸 두서없는 말을, 너는 그저 창가에 기대어 서서 조용히 듣고만 있을 뿐이었다. 위로도, 동정도, 경멸도, 호기심도 없이, 그저 조용히. 그것은 굉장히 거북한 침묵이였지만, 동시에 아주 편안한 침묵이었다. 아무것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너의 덕에 나는 내 가슴속에 묵혀두었던 새까맣고 더러운 감정을 뱉어낼 수 있었으니. 비뚤어진 세상, 일그러진 애정, 뒤틀린 가치관, 존재하지 않는 정의,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그 모든 것이 나의 숨을 억매여오고 나의 몸을 휘감아 조여맨다. 나를 절대로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이, 도망칠 길은 어디에도 없다는 듯이, 발부터 시작해서 스믈스믈 올라와 목까지 틀어잡고 조여대는 것에 숨이 막혔다. 고개를 숙이고 차가운 책상에 볼을 가져다 대면 아래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온다. 여름을 잊게 하는 그 서늘하고도 차가운 그 감촉은 너무나도 끔찍했다. 뒤를 돌아보면 어느새 성큼 다가와 있는 그것과 매우 닮아있는 감촉은 내가 나 자신으로서 올곳이 살이있는건지 알 수 없게 만든다. 마치 나는 지금 죽어있다는 것처럼. 죽음. 그것은 본질적이고, 변하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자애로운 것. 그렇기에 더욱 두렵고, 잊고 싶고, 멀리하고 싶은 것. 혼자서 미지를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돌리고 외면하며 끊임없이 도망가기만 하는 그런 나를 비웃는 것. 나는 항상 그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그런것처럼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으면 좋을텐데. 세상의 이상을 눈치채지 않고 자유로웠다면 좋았을 것인데.
그래서 너에게 그리 이야기한 것은 정말로 충동적이였다. 누가 나를 미쳤다고 비난해도 좋았다. 그저 이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고해성사를 하듯, 잘못을 털어놓듯, 누군가에게 이 답답함을 떠넘겨버리고 싶었다. 타인을 이용해서 타인에게 괴로움을 지우고 자신의 괴로움을 덜려고 하는 그런 치졸한 짓임을 알고 있었다. 그런 자신에게 혐오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뜬금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나의 질문에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 뒤에, 너는 살며시 미소지었다. 어쩔 수 없는 아이를 보는 것 같이, 어떠한 사랑스러운 것을 대하는 것 같이. 한걸음, 한걸음. 창가에서 몸을 떼어 내 앞으로 다가온 너는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어루만지던 손이 그대로 볼을 미끄러져 내려와 턱을 붙잡고, 너와 나의 입술이 서로 맞닿았을 때, 나는 너의 손길이, 맞닿은 입술이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서늘하고 차가웠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천천히 나의 체온이 옮겨가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죄를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의 답답함이 덜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내가 들어내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하나 더 가슴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그 무더운 여름날, 끔찍하게 추운 침묵 속에서, 매미만이 시끄럽게 울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 시계가, 돌았다.
너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여름날의 매미가 뜨겁게 구애의 노래를 외치는 것처럼, 나방이 불을 향해 열정적으로 몸을 뛰어드는 것처럼, 주어진 시간이 지금밖에 없는 것처럼, 노아의 방주에 남은 유일한 아담과 이브인것처럼, 두개의 색이 끈적끈적하게 녹아 하나의 색으로 섞여버릴 것처럼, 그렇게. 그렇지만 섞어버린 색은 전혀 아름답지가 않았다. 오히려 끈적끈적하고, 보기만 해도 불쾌해질 것 같은 더러운 색.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없이 끌려들어갈 것만 같은, 심연의 색. 너와 몸을 섞은 그날, 불현듯 그것을 깨달은 내 가슴에는 또 무거운 무언가가 하나 더 늘어났다.
─ 시계가, 돌았다.
아스카와 같이 쇼핑을 갔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뛰어나고 밝고 자부심 강한, 그런 학교의 아이돌이였다. 단 한번도 남에게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고지식하고 바보같은 아가씨. 그렇지만 나도 그런 것은 마찬가지였으니 그녀를 비난할 자격은 없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트라우마를 서로 알지 못했고,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심각한 것인지 알기에 함부로 건드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많이 다르지만 어느 의미 우리 두 사람은 동류였다. 만일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줄 수 있었다면 우리는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었겠지. 그렇지만 그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이 서로가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어지지도 못한채 곁에 있었다. 단 한번도 그 화제를 꺼낸적은 없었고 서로에게 완전히 속내를 드러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서로의 앞에서 우리는 조금이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숨막히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있는 호흡장소. 그렇지만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새로운 쉴 장소가 생긴 모양이다. 그것도 고양이가 아웅하는 정도가 아닌, 자신의 모든것을 벗어버리고 전력으로 부딪힐 수 있는 그런 장소가. 좋아하는 디저트를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얼굴은 한결 편해보였다. 축하할 일이지만 질투가 났다. 항상 그녀의 행복을 바래왔을에도 그것을 진심으로 축하하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많이 달라진 것 같네. 그렇게 말하면서 한모금 마신 커피는 매우 쓴 맛이 났다. 너도 그렇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말은 그대로 흘린 채 눈을 감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떠올린 것은 너의 얼굴이였다.
─ 시계가, 돌았다.
그 해의 여름은 매우 뜨거웠고, 기분이 나빴다. 너와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기분이 나쁜 것만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심장이 고장난 듯 바쁘게 뛰어 가슴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말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 나쁨. 나 자신을 잃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감. 그렇지만 나는 너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너를 보지 않을 때면 항상 허전하고 울 것 같이 되어버렸으니. 만나도 좋은 것이 없고, 만나지 않더라도 좋은 것이 없다. 그 생각을 너에게 고하면 너는 귀여운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나의 뺨을 매만졌다. 담배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하고 너와 옥상에서 몸을 겹치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목에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몸에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지독하게 의존하게 만들어버리는 중독적인 것. 나에게 너는 그런 것이였다. 담배처럼. 언젠가 나는 너의 손에 죽는게 아닐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너와 나눈 키스는 철 맛이 났다.
─ 시계가, 돌았다.
이번 일직은 신지군과 같이였다. 그는 칠판을 지웠고, 나는 프린트물을 정리했다. 조용한 침묵이었다. 마치 너와 같이 있을 때 같은 침묵. 그렇지만 조금 달랐다. 조금더, 뭐라고 할까, 설명할 수 없지만 많이 달랐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프린트물을 정리하고 일지를 펼치자 어느새 칠판을 전부 지운 그가 나의 앞자리에 앉았다. 일지를 써나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그가 말했다. 나는 너와 이야기해보고 싶었어. 고개를 든 나에게 그는 민망한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카오루군이, 너의 이야기를 자주 했거든.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거의 말이 없던 우리 두사람이었지만, 어쩌다 가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을 때 너의 입에서 나오는 친구의 이름은 신지, 그 하나였으니. 신지군의 이야기를 하는 너는 그떄는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나빴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너는 신지군과 사귀었을 것 같네. 그 말에 너는 나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실제로 우리 두 사람은 단 한번도 사귄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지만 마치 남자친구에게 질투하는 여자친구 같은 행동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아무런 부정도 하지 않고 속이려고 드는 너의 속내를 알았기에, 더더욱 나 자신이 싫었다. 카오루군은, 그가 한참 뜸을 들이다 말을 이었다. ─나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야. 그는 자신을 낮추고 주변의 눈치를 잘 보는 사람이였지만, 그의 이야기를 할 때에는 단 한번도 시선을 돌리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다. 너도 나와 같구나. 너를 살아있게 만드는 그는 싫었지만, 너를 좋아하는 그는 좋아했다.
─ 시계가, 돌았다.
세계는 곧 끝날거야. 갑자기 당돌하게 말을 꺼낸 너는 늘 그랬듯 상냥하게 나를 밀어넘어트렸다. 너는, 나 없이는 살 수 없을거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만들어버린게 누군데, 라고도 생각했다. 그거야 물론,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만. 그렇게 너는 말했다. 생각을 읽어버린 것처럼. 물론 내가 노골적으로 그렇게 묻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겠지. 그러니까, 너는 나의 목에 키스마크를 새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먼저 죽여줄게. 아침 인사를 하듯, 평탄하고 평안한 어조로.
─ 시계가, 돌았다.
멍한 시야 속에서 너의 얼굴이 오롯이 담긴다. 숨이 가쁘고, 호흡이 어려워. 눈물의 탓일까, 산소 부족의 탓일까. 아, 방금 그것은 주마등이구나. 새삼 느낀 감상을 내뱉을 기력도 없어 멍하니 몸을 맡긴다. 사랑해. 금방 따라갈게. 그런 너의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감긴다.
아, 이것은 사랑이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렇게 생각했다.
에반게리온 / 나기사 카오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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