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花明麗月
갑갑하다. 자꾸만 올라가는 손에 자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말쑥한 정장을 입을 기회는 바로 최근까지 학생이었던 자신에게는 거의 없었던 탓일까. 교복 와이셔츠랑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기분 탓인지, 아니면 정말로 다른 것인지. 끝까지 채운 단추가 문제인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꽉 조여 맨 넥타이가 문제인 것일까, 목이 지독히도 갑갑하게 느껴졌다. 풀고 싶어. 적당히 느슨하게 해 둘까... 그렇게 생각하고 손가락을 넣어 가볍게 잡아당겨보았지만, 어느 정도가 적당히인지, 그 정도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너무 느슨하다 못해 풀려버린 넥타이를 손에 쥐고 바라보다 한숨을 쉬었다. 다시 묶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벌써 이 과정만 몇 번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마 ..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오로지 침묵이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한 적막. 그렇지만 어디나 아늑하고, 안심감이 있는 장소. 말 한마디 없는 공간인데, 하고 싶은 말들과 할 말들이 투명한 형태를 이루고 공간을 가득하게 채운 그런 압박감이 희미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은 때때로 요람을 떠올리게 하곤 했다. 양수로 가득 찬 요람 속을 기억한다면 마치 이런 느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게 할 정도로. 息も絶え絶えな恋心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 것을 확인하고 표지를 덮었다. 복잡한 타국의 언어로 이루어진 고급스러운 표지를 한 번 쓸어보면 거칠하면서도 부드러운 가죽 특유의 감촉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만 돌려서 남은 손을 바라보면 그 손을 붙잡고 조용히 잠들어 있는 그녀가 보였다. “우응...” 흘러내리..
소년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神隠し 소년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한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 수수께끼를 풀어내야 만족하는 아이였다. 그런 소년에게 있어 부모의 손에 이끌려 방문한 자그마한 낯선 땅은, 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보물지도 그 자체였다. 소년이 난생 처음 가 본 조모의 집. 자그마한 마을. 푸른 산이 뒤에 있고 고양이가 길가에서 낮잠을 하는 시골마을. 완전히 기대감에 부풀은 소년은 조모에게 인사를 마치자마자, 어머니가 엄마 아빠는 할머니랑 할 말이 있으니까, 라고, 채 말을 끝맺기 전에 놀다 오겠다며 달음박질을 쳤다. 멀리까지 나가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부모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산쪽으로는 가지 말라는 조모의 말을 듣지 못하고 달려나간 산 속에..
손등은 …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실험체일 뿐인 너에게 나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 어제의 동료였고, 예전의 자신의 환자였던 새하얗고 순진한 사람. 교수님을 따라 방문했던 고아원에서 만났던 너는 고아였으나 티 없이 맑게 자랐고, 비뚤어지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사이도 좋았고, 교수님의 동료라던 새하얀 머리의 남자를 유독 잘 따르곤 했다. 자신도 선생님이 되어서, 교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 몰래 비밀이야기를 하듯 그리 말해주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난 무슨 대답을 했었던가. 꼭 그리 될 수 있으리라 격려를 해주었던가? 아니면 교수님은 그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비난해주었던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네가 선생님이 아닌..
cruel fairy tail 눈이 보고 싶어. 고급스러운 검은 소파에 가로 누운 채 무료히 중얼거린다. 팔락이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대답이 울려퍼지지 않은 방 안. 애초부터 대답을 구하던 것은 아니였지만 내심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스노우 볼을 집어올린다, 맑고 깨끗한 수정 속에는 아랍에나 나올법한 디자인의 궁과 야자수가 들어 있다. 작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만들어 낸 수정을 뒤집으면 바닥에 깔린 모래가 쏟아져 내린다. 모래가 전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금 되뒤집으면 모래는 다시 우수수 궁전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마치 눈과 같은 형상. 그렇지만 본질은 새햐얗고 깨끗한 눈이 아닌 노랗고 탁한 모래. 그 우스운 작태를 비웃어본다. 그래, 이곳은 ..
무더운 여름. 너를 떠올릴 때, 그 뒷배경은 항상 무더운 여름이었다.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랗게 맑은 하늘.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강렬한 태양 빛, 시끄럽게 짝을 찾아 내지르는 매미 소리. 피부에 달라붙는 습하고 눅눅한 더운 공기. 너는 어디를 보아도 여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는데, 네가 있는 풍경은 언제나 무덥디 무더운 여름이였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강렬하고, 뜨겁고, 잊혀지지 않는, 여름의 색이었다. "이 세계는 미쳐있어." 그것이 너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날, 내가 너에게 건넨 말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 기억속의 너는 반팔이였으니 아마도 여름이었겠지. 아무도 없는 텅 비어버린 교실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가리고, 그렇게 뱉어낸 두서없는 말을,..
19일의 금요일 십구금의 날을 기념하여 트위터에서 멘션받은 드림컾으로 500자 내외로 조각수위 쓰기. 01. 스가리리 “리리, 리리.” 여기봐. 소년이 그렇게 말해도 소녀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소년이 쓸어내리는 손길 하나하나에 피부를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바르르 떨고 있으면서. 평소에는 그리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소년을 당황시키곤 했었는데. 지금의 소녀의 모습에선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수줍은 소녀의 모습이 소년은 좋았다.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는, 나만이 아는 소녀의 사랑스러운 모습. 쇄골에 붉은 자국을 새기며 손을 아래로 쓸어내린다. 가슴의 가장 높은 곳까지 가볍게 쓸어내린 뒤 첨단을 손가락으로 굴리면 요동치듯 몸이 흔들린다. 양 손가락으로 잡아 돌리면 힛, 하고 짧은 비명을 지..
"응, 착하지... 입, 벌려?" 시키는 대로 작게 입을 벌리는 나의 백합의 턱을 가볍게 잡아 올린다. 은하수를 닮았다고 했던 은회색의 눈 안에 오롯이 자신이 담기는 것을 바라보며 다른 한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쓸었다. 거스러미 하나 없이, 부드럽고 매끄러운 입술. 그런 입술을 살짝 누르며 미소지었다. White Tulip 스가와라 코시 x 시라하나 리리 x 시미노라 이츠키 "정말 고마워, 잇쨩." 유리가 웃으며 말했다. 너무 많이 말하면 립이 다 지워질거야. 그렇게 말하면 유리는 그러면 새로 발라줄거잖아? 라며 웃는다. 물론, 당연히. 너를 가장 아름답게 꾸미는 역할을, 다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으니까. 이것저것 공부하면서 배워두었던 화장이 이런 때 도움이 된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덕분에..
情絲怨緖 [정사원서] 애정(愛情)과 원한(怨恨)이 실같이 얼크러짐 위잉, 위잉.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았을 가벼운 진동소리. 어떤 이에게는 사소하게 넘겨버릴지도 모르는 그런 핸드폰의 알림 소리. 그렇지만 나에게는, 그것을 애타게 기다려온 나에게는 그 어떤 소리보다도 크게 들리는 소리. 진동소리를 느끼자마자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황급히 탁자 위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지만 펼쳐든 핸드폰에 표시되는 것은 그저 쓸데 없는 스팸메일 뿐. 기대는 당장에 짜증으로 바뀌어 날아오른 기분은 급격하게 땅 아래로 추락한다. 당장이라도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싶지만, 그렇게 해버리면 이후 오는 알림을 확인하지 못하니까. 애써 충동을 억누르고 한숨을 내쉰다. 이때까지 당신에게서 온 전화, 없음. 문자, 없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