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明麗月
[夢/多] 그릴비루차 본문
손등은 …
깨끗한 사람이다, 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실험체일 뿐인 너에게 나는 그런 마음을 가졌다. 어제의 동료였고, 예전의 자신의 환자였던 새하얗고 순진한 사람. 교수님을 따라 방문했던 고아원에서 만났던 너는 고아였으나 티 없이 맑게 자랐고, 비뚤어지지 않은 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사이도 좋았고, 교수님의 동료라던 새하얀 머리의 남자를 유독 잘 따르곤 했다. 자신도 선생님이 되어서, 교수님처럼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다 몰래 비밀이야기를 하듯 그리 말해주었던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난 무슨 대답을 했었던가. 꼭 그리 될 수 있으리라 격려를 해주었던가? 아니면 교수님은 그렇게 착하고 좋은 사람이 아니라고 비난해주었던가? ...그렇지만 지금은 그런것은 아무래도 좋다. 문제는 네가 선생님이 아닌 연구원으로, 나와 같은 실험실에 들어앉아있다는 것이지. 그대로 자신의 생각을 밀고 나갔으면 좋았을테인데 너무도 여리고 약한 너는 교수님을 거부하지 못하였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몇번이고 헛구역질을 하는 너를 멀리서 몇번이고 지켜보았다. 언뜻 지나갈 때 나를 발견한 너의 눈은 처음에는 반가움으로, 나중에는 경악과 절망으로 점칠되어 갔다. 가엾은 아이. 너는 이제 계속해서 실험을 계속해나갈 것이다. 몇번이고 이 참혹한 광경에 헛구역질하면서도 익숙해지겠지. 익숙해지는 그런 자신에 강하게 혐오를 느끼고, 종국에는 그 혐오감마저 익숙해질 터이다. 그리고는 포기하게 되겠지. 강한 존경과 동경은 잊어버린지 오래가 될 것이다. 자신의 꿈은 더이상 기억나지 않고, 그저 주어진 일을 꾸준히 해낼 뿐인 기계가 되겠지. 그리고 어느날을 경계로 한번에 무너지고 망가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너의 끝은 아마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내미는 것이 될 것이다. 누구도 아닌 교수님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십여년 전. 너의 특기를 발견하고서 환호성을 지르던 교수님을 기억하고 있다. 너를 이용하기 위해 선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적당히 받쳐주는 외모의, 고분고분하고 순종적인 제자를 너와 친해지라 내미던 교수님을 알고 있다. 흔들리는 너를 제대로 잡아세우고 달디단 말로 허물어트리라 명한 교수님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서 울린다. 실험체의 죽음을 앞에 두고 쉴 새 없이 눈물을 닦아내는 너의 손을 겹치듯이 잡는다. 자해의 흔적이 역렬한 너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다대면 너는 결국 무너져내린다. 누나, 누나. 오래전 들어왔던 그리운 호칭을 부르며. 천천히, 그렇지만 쉬지 않고. 허물어져내리는 너의 마음을 부여잡고 달디 단 독으로 채운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너의 모든 것을 받아주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일. 이런 간단한 것에 걸려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지는 네가 진심으로 가엾다. 그리고 그런 가엾은 너를 사랑스럽다 여기는 나는 상당히 추악하고 불결한 것일터이다.
너의 특기로 나도 정화할 수 있다면 좋을텐데.
백모래
이마 위는 …
스포츠는 잔인하다. 아무리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재능이 없다면 묻혀버리기 쉽상이니까. 화려한 무대속에서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는 관계가 없다. 얼마나 뛰어난지, 얼마나 화려한지만이 남아있을 뿐. 과정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결과지. 아무리 연습을 철저하게 한 노력가도 노력하지 않은 천재에게 무릎 꿇는 것이 당연시되는 잔혹한 곳. 그런 잔혹한 현실의 바다속에서 끝내 농구를 놓지 못해 꼴사납게 발버둥치는 그는 가엽디 가엾은 사람이겠지. 가장 좋아하던 농구. 노력 하나만큼은 자신을 가질 정도의 연습량. 피놔 땀과 눈물로 이루어 낸 지금의 실력. 그것이 자신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시작한, 자신의 동생의 천부적인 재능에 뒤쳐지고 밀려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심지어 그것이 자신이 그에게 농구를 권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였다면. 더더욱. 아끼고 아끼는, 가장 좋아하는 동생에게 그것을 차마 내색할 수 없어 안으로 켜켜이 쌓아온 그 속내는 까맣게 물들고 문드러져 심장을 긁어낸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으면서도 서서히 밀려오는 설움과 미움에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그러면서도 끝끝내 그 원흉을 놓아버릴 수 없을 정도로 농구를 좋아하는 그. 오늘, 타이가랑 싸웠어. 그렇기에 오늘 갑자기 집에 쳐들어와 울면서 이야기 하는 그 사실은 전혀 놀라울 것이 없는 일이었다. 언젠가는 올 미래였고,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는 현실이였으니. 그것은 자신의 스승인 알렉스에게도, 자신의 아끼는 동생인 타이가에게도 차마 말할 수 없었겠지. 그 고리 안에서 유일하게 농구를 하지 않는. 그렇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연상의 나이기에 겨우겨우 털어놓을 수 있는 슬픈 속내. 아이 취급 당하는 것을 싫어하고, 젠체 어른스럽게 굴며, 남을 돌보는데 익숙해져 있는 그가 이 순간만은 어린 아이가 어미에게 매달리는 것 처럼 나에게 몸을 맡기고 문드러진 속내를 털어놓는다. 나만이 알고 있는 그. 나 혼자만이 알고 있는 그의 여리고 약한 모습. 그가 오로지 나만을 의지해준다는 이 현상에 약간의 기쁨과 자부심을 가지는 나는 상당히 비뚤어진 인간이겠지. 당신은 친절하고 상냥해. 한참을 울다 붉어진 얼굴로 살며시 말해오는 그 소리에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희미하게 웃는다. 아니야, 히무로.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착하고 좋은 사람이 이냐. 나보다 훨씬 어린 아이에게 사랑을 하고, 그 어린 아이가 약해져 있는 틈을 타 그 틈새에 자신을 메우고, 그것을 기뻐하고 있는 비겁자지. 속내를 차마 밝히지 못하고 그의 착각에 의지하는 구역질이 날 정도로 비겁하고 옹졸한 자신을 혐오하며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의미를 속인 키스. 지금은 좋은 누나를 연기하고 있어.
히무로 타츠야
볼에는 …
힐긋. 가만히 눈동자만 도르륵 굴려 바라본 선배는 앞만을 곧게 바라보고 있다. 나에게 자신의 가방을 들리고, 대신 들고 가던 무거운 드링크 박스를 들고 걸어가는 선배. 언제나 앞만을 바라보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람. 망설임 없이. 좌절할 시간에 하나라도 더 노력하는 사람. 동경하는 멋진, 가장 좋아하는 선배. 그 선배가 지금은 긴장감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는 사실이 더 할 나위 없이 우습다. 짐짓 무서워 보이는 그 굳은 얼굴이, 사실 화가 난 것이 아니라 부끄러워 어쩔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누가 눈치챌 수 있을까. 선배를 처음 만난 것은 학교 견학 때였다. 고교입시를 위해 각 고등학교가 입시회를 개최할 무렵. 우연히 길을 잃고 헤메다 들어간 체육관에서 선배를 보았다. 막 연습시합이 한창이던 코트 안에서 힘차게 모두를 통솔하던 그 모습은 너무나도 크고 듬직해서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곳, 카이조로 왔다. 농구부에 들어왔다. 첫눈에 반한 당신을 보기 위해. 그러나 놀랍게도 선배는 여성에 관해 굉장한 쑥맥이였다. 그 모습은 가히 여성 공포증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여성에게 면역력이 없었다. 시합 중에는 그렇게 강하고 커보이던 모습이 내 앞에선 조그맣고 귀엽게만 바뀌어서 어쩔줄을 몰라한다. 여자가 서투르고 서툴러서, 어떻게 다뤄야할지를 모르는 서투른 사람. 먼저 말을 건네면 몸이 딱딱하게 굳고, 귀가 새빨개져서 벌벌 떠는 귀여운 사람. 그런 귀여운 모습은 여성에게 없던 가학심과 총애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은 엄중비밀. 그런 주제에 배려는 쓸 데 없이 좋아서 매니저의 일인데도 여자아이니까, 라는 이유로 고생을 사서 하고, 지금도 이렇게 천천히 내 발걸음에 맞춰서 걸어주고. 그렇게 여자가 무섭다면 가까이 하지 않고 거리를 두면 좋을텐데. 천성이 친절한 선배는 결국 여자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무섭고, 두려운 인상을 심어주면서도, 험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끝까지 여성을 배려하고 도와주는 상냥한 신사의 모습. 그렇게 나를 더 빠져들게 만들어버려. 좀 더 보여줘요. 좀 더 그 색다른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세요. 그렇게 속으로 빠져나오려는 말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자니 곧 눈에 들어오는 체육관. 약간의 아쉬움을 담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자 선배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시선을 옮기다 그의 큰 손을 내 머리에 얹는다. 바삭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고 서투르지만 따뜻한 선배의 손길. 참을 수가 없어서, 선배의 손을 힘차게 끌어내려 숙여진 선배의 볼에 입을 맞춘다. 순간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나 파악하지 못하는 선배의 귓가에 한마디 속삭여주고 뒤를 돌아 달아난다. 등 뒤에서 들리는 것은 쿵 하고 바닥에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과 그의 이름을 부르는 다른 선배의 다급한 목소리.
정말 좋아해요, 선배!
카사마츠 유키오
입술에는 …
그는 지극히도 서투른 사람이다. 그와 동시에 무척이나 냉정한 사람이다. 그에게 주변의 사람들은 단 두종류로 구분될 것이자. 자신의 선 안에 들어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자신의 선을 확실히 구분지어두고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잣대로 평가를 내린다. 선 안의 사람에게는 무슨 일이든 지나칠 정도로 관대하다. 그것이 윤리에 어긋나고, 스포츠 정신에 어긋나며, 학대와 가까운 것일지라도. 그리고 선 밖의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무심하고 냉정하다. 그것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상처가 되고, 절망이 되며, 지옥과 같은 것일지라도. 이 얼마나 오만하고 오만한 생각일까! 마치 자신이 이 세상 누구보다도 우위에 서 있다는 그 고고한 눈으로 사람들을 깔아내려다보는 것이다. 은연중에 자신을 가장 위로 올려 놓는다는 것은, 아마 그도 눈치채지 못하겠지. 말했다시피, 그것은 '무의식적인 것'이니까. 귀찮을 정도로 까불까불한 친우를 부리면서도 끝까지 어울려주는 것도, 진인사를 내걸고 항상 무엇이든 최고를 향해 노력하는 것도, 장난으로 순진하게 약자를 유린하고 능욕하는 것에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것도. 그 자신이 다른 자들보다 위에 서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뭐, 어쩔수 없다고 할까, 당연하다고 할까. 실제로 그는 어지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닐 터이다. 그 우수함으로 단 한번도 남에게 져본적이 없었을테고, 자연스럽게 몸에서 배어 나오는 그 행동은 우아하고, 고고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다. 고의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으로 항상 누군가의 위에 있었기 떄문에, 그것이 당연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구역질이 난다. 차라리 정말 주변을 깔보고 있다는 태도를 보여주면 좋으련만. 자신은 전혀 그런 식으로 남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으니. ...아니, 사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냥 그는 언제나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고, 단순히 표현하는 법이 서투른 것일지도 모른다. 남들과 어떻게 교류를 해야할지 그 거리감을 제대로 잡지 못해 오는 것을 받아들이고 가는 것을 막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모든것은, 옹졸하고 속 좁은 나의 단순한 질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알 수 없다. 나같은 바보는. 한심하고 바보같아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밑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것이 한계인 나로서는 언제나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의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을리가 없다. 나와 너무 다른 너를 사랑하고 있지만, 그렇기에 너를 사랑할 수가 없다. 알고 있을까, 미도리마. 사랑에 빠지면 바보가 되어버린다고 하지. 그러니 너도 얼른 나와 같은 곳으로 떨어져오면 좋겠어.
나는 너를 진심으로 사랑하기 위해, 너에게 사랑을 한다.
미도리마 신타로
감은 두 눈 위에는 …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조용히 울려퍼지는 방 안 침대에 누워 몸을 뒤척인다. 오른쪽으로 몸을 돌려보고, 왼쪽으로 몸을 웅크려도 보고, 바로 누워보기도 하며 어떻게든 잠을 자기 위해 애써보지만 도통 불안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다. 몇시나 되었을까. 그는 무사할까.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괜찮은걸까. 한번 생각하자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불안감에 결국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조용히 방문 너머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저벅이는 발소리가 멀어지고, 곧이어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린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쳐다본 시계는 자정을 한참 넘긴 시각을 가리키고 있다. 손을 더듬어 침대 옆 전등에 불을 켜는 것과 동시에 방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온다. 어서와. 조심스럽게 소리를 내지 않고 열리는 문을 향해 말을 건네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답장이 되돌아온다. 일어나, 있었네. 털썩. 그가 침대에 걸터앉자 삐걱하고 침대가 비명을 지른다. 그대로 나를 껴안아오는 그의 팔 힘은 너무나도 조심스럽다. 마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세공품을 다루는 듯한 상냥함과 조심스러움. 너무도 많은 것을 신경 쓴 나머지 정신이 불안해져 있을 때 그는 언제나 훨씬 더 나에게 조심스러워진다. 가끔은 제 분에 못 이겨 화를 내주어도 좋을텐데. 거칠게 다루어도 신경쓰지 않을 터인데 오히려 훨씬 더 상냥하게, 세심하게 대해주는 그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려온다. 아, 나는 그가 편안하게 지낼 장소는 되지 못하는구나, 하고. 조금은 나에게 응석부려도 좋을텐데.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어버린 그는 좀체 사람에게 기대는 것이 서툴러서. 사람과의 교류가 충분하지 않아서. 지금도 그렇게 후회하고 있으면서. 복수엔 아무것도 남지 않고 끝은 결국 자신의 파멸 밖에 남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그러하더라도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결국에는 손에 피를 묻힐 정도로 가엾고 상냥해서. 지금 가장 괴롭고 힘든건 본인일 터인데 오히려 그를 걱정하고 있을 나를 걱정해줄 정도로 착하고 애처로워서. 희미하게 풍기는 혈향을 애써 외면하며 마주 껴안고 그의 등을 매만져주면 몸이 미세하게 떨려오고 어깨가 천천히 젖어간다. 서투르게 응석을 받아주는 어머니의 흉내는 그에게 구원이 되었을까. 오히려 그를 더 괴롭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자문해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다만 그렇게 비명조차 토하지 않고 뚝뚝 눈물만 흘리다 잠든 사랑스러운 그를 침대에 누이며 발개진 두 눈 위에 소원을 담아 입을 맞춘다.
부탁이야, 사랑하는 그에게 행복을 줘.
크라피카
팔 위에는 …
너는 정말로 인기가 많네. 텔레비전 속에서 쑥스러운 듯 웃고 있는 너를 보면 새삼 그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상해. 그렇게 중얼거리면 뒤에서 배를 감싸안고 있는 팔이 움찔하고 가볍게 떨린다. 그리고는 곧이어 좀 더 강한 힘을 주어 꾹, 하고 나를 구속해온다.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웅얼거리는 그. 나, 인기 모델인데. 확실히 그는 인기 많은 모델이다. 지금도 이렇게 토크쇼에 등장할 정도로. 중학 시절에는 취미였다는 모델 일은 고등학교 마지막 인터하이를 마치면서 점차 본격적인 활동이 되어간다. 잡지 모델 뿐만 아니라 패션에까지 손을 대어버리고, 광고도 찍는다. 지금은 어딜 가더라도 곳곳에서 그를 볼 수 있는 수준. 토크쇼가 휴식에 들어가자 뜨는 광고에도 여전히 그가 들어있다. 새하얀 시트에 누워 화면을 바라보고, 몸을 돌려세워 팔을 베고 화면을 향해 손을 뻗는다. 정말로 사랑스러운 사람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는 것 처럼 아름답고 황홀한 표정에 숨이 멎는다. 이 광고를 통해 그에게 반하지 않는 여자는 없을거야, 분명. 약간의 시샘을 담아 돌고 있는 팔에 가볍게 손톱을 세우자 그가 어리광 섞인 목소리로 묻는다. 나 멋있죠? 다시 반했어요? 나를 생각하면서 찍었다는 광고를 앞에 두고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는 그는 화면속과는 달리 가볍고 사랑스러움이 넘친다. 금욕적이고 매혹적인, 존재 자체가 위협적인 화면과 달리 이쪽의 그는 귀엽고 어쩔 수 없는 작은 애완동물. 이 상당한 갭이 그의 인기를 실감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나를 불안하게 하는 원인이기도 하고. 화면속의 그는 너무나도 아름답다. 그렇지만 동시에 평소 내가 보아오던 모습과는 정 반대의 낯선 모습이기도 하다. 내가 모르는 그. 내가 본 적이 없는 그. 내가 알지 못하는 새로운 그. 익숙한 것이 좋은 나에게 그 모습은 나와는 너무도 동떨어져있고, 익숙해질 수 없어서, 망설이게 한다. 광고가 끝나고 화면이 돌아오면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MC와 이야기를 나눈다. 막 이상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그가 웃으면서 제 애인은 팬이예요, 같은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는다. 아아, 정말 싫다. 그가 인기 모델인 것은 알고 있어. 인기 모델에게 스캔들은 파멸과 같은 것. 그렇기에 철저히 비밀에 부쳐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사이. 그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숨기는 그를 보고 있자면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견딜수가 없어진다. 삐걱삐걱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견디며 미안한 듯 머리를 쓰다듬어오는 그의 팔을 잡아 그대로 이를 가져다댄다. 키스마크는 붙일 수 없지만. 그래도. 그와 동시에 내 어깨에 마찬가지로 이를 박아오는 그를 비웃는다. 속박하는게 싫다니, 순 거짓말쟁이.
키스마크 대신 붙이는 것은 질척한 집착과 속박.
키세 료타
그리고 그 밖에는 …
이 세계는 미쳐있어. 그것이 너와 내가 처음 만나게 된 날, 내가 너에게 건넨 말이었다. 비뚤어진 세상, 일그러진 애정,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그 모든것이 나의 숨을 억매여오고 나의 몸을 휘감아 조여맨다. 차가운 책상에 볼을 가져다 대면 아래에서부터 한기가 올라온다. 그 감촉이 너무나도 끔찍해서, 죽어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정말로 충동적이였다. 누가 나를 미쳤다고 비난해도 좋았다. 그저 이 답답함을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었을 뿐이다. 고해성사를 하듯, 잘못을 털어놓듯 누군가에게 이 답답함을 떠넘겨버리고 싶었다. 그런 뜬금없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 나의 질문에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침묵 뒤에, 천천히 내 머리카락을 어루만졌을 뿐. 그 손길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서늘하고 차가웠다. 나는 죄를 털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가슴의 답답함이 덜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내가 들어내려고 했던 것보다 훨씬 무거운 무언가가, 하나 더 가슴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천천히 느끼고 있었다. 그 무더운 여름날, 끔찍하게 추운 침묵 속에서, 매미만이 시끄럽게 울음을 내지르고 있었다. ─시계가, 돌았다. 그와 나는 빠르게 가까워졌다. 여름날의 매미가 뜨겁게 구애의 노래르 외치는 것처럼, 나방이 불을 향해 열정적으로 몸을 뛰어드는 것처럼, 두개의 색이 끈적끈적하게 녹아 하나의 색으로 섞여버릴 것처럼, 그렇게. 그렇지만 섞어버린 색은 전혀 아름답지가 않았다. 오히려 끈적끈적하고, 보기만 해도 불쾌해질 것 같은 더러운 색. 그와 몸을 섞은 그날, 불현듯 그것을 깨달은 내 가슴에는 또 무거운 무언가가 하나 더 늘어났다. ─시계가, 돌았다. 그 해의 여름은 매우 뜨거웠고, 기분이 나빴다. 그와 함께 있을 때에는 언제나 기분이 나쁜 것만을 보게 되는 것 같아. 심장이 고장난 듯 바쁘게 뛰어 가슴이 아프고, 속이 울렁거리고 구역질이 날 것 같아 말은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기분 나쁨. 그렇지만 나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를 보지 않을 때면 항상 허전하고 울 것 같이 되어버렸으니. 담배라는 것이 이런 느낌일까, 하고 그와 옥상에서 몸을 겹치면서 멍하니 생각했다. 목에 가벼운 통증이 일었다. 몸에 좋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주제에, 지독하게 의존하게 만들어버리는 중독적인 것. 나에게 그는 그런 것이였다. 담배처럼. 언젠가 나는 그의 손에 죽는게 아닐까, 하고 멍하니 생각했다. 그와 나눈 키스는 철 맛이 났다. ─시계가, 돌았다. 세계는 곧 끝날거야. 갑자기 당돌하게 말을 꺼낸 그는 늘 그랬듯 상냥하게 나를 밀어넘어트렸다. 너는, 나 없이는 살 수 없을거야. 그렇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가 목에 키스마크를 새기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너를 먼저 죽여줄게. ─시계가, 돌았다. 멍한 시야 속에서 그의 얼굴이 오롯이 담긴다. 숨이 가쁘고, 호흡이 어려워. 눈물의 탓일까, 산소 부족의 탓일까. 아, 방금 그것은 주마등이구나. 새삼 느낀 감상을 내뱉을 기력도 없어 멍하니 몸을 맡긴다. 사랑해. 금방 따라갈게. 그런 그의 말을 마지막으로, 시야가 감긴다.
아, 이것은 사랑이였을지도 모른다.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렇게 생각했다.
나기사 카오루
손등은 순결의 키스
이마 위는 우정의 키스
볼에는 친절의 키스
입술에는 애정의 키스
감은 두 눈 위에는 간청의 키스
팔 위에는 욕망의 키스
그리고 그 밖에는 모두 미친 것
- 그릴비루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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