花明麗月
[夢/多] 잔혹동화 100제 본문
cruel fairy tail
눈이 보고 싶어.
고급스러운 검은 소파에 가로 누운 채 무료히 중얼거린다. 팔락이는 책장 넘어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 대답이 울려퍼지지 않은 방 안. 애초부터 대답을 구하던 것은 아니였지만 내심 섭섭함을 숨기지 못하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스노우 볼을 집어올린다, 맑고 깨끗한 수정 속에는 아랍에나 나올법한 디자인의 궁과 야자수가 들어 있다. 작고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써서 만들어 낸 수정을 뒤집으면 바닥에 깔린 모래가 쏟아져 내린다. 모래가 전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다시금 되뒤집으면 모래는 다시 우수수 궁전을 향해 떨어져 내린다. 그것은 마치 눈과 같은 형상. 그렇지만 본질은 새햐얗고 깨끗한 눈이 아닌 노랗고 탁한 모래. 그 우스운 작태를 비웃어본다. 그래, 이곳은 알라바스타. 눈이 내릴 수 없는 사막의 나라. 비조차 내리지 않은, 지독한 가뭄의 나라.
지독한 가뭄이 계속되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 원망을 하늘에 뱉어내고, 왕국이 무능하게 대책을 세우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는 붕 떠 있는 이질적인 존재. 그 이질적임은 그야말로 눈과 같이. 커다란 수조로 되어있는 벽 저편에서 악어가 유유자적 헤엄을 칠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넘쳐나고, 세계 각지에서 호화를 누리며 서로 누가 돈을 더 많이 내버리는가 경쟁을 하는 사치의 도시. 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은 눈 앞에 있는 사랑스러운, 지독히 잔인한 나의 님. 나라 하나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죽어가는 국민들을 상대로 무료함을 달래는 그의 거대한 장난의 일부.
그래도, 눈이 보고 싶어. 어떻게든 눈이 보고 싶어. 투정부리듯 조르자 맞은 편에서 가만히 책을 읽고 있던 그가 책장을 덮는다. 책상에 올려진 담뱃곽에서 시가를 하나 빼어 불을 붙이고 천천히 호흡하고 연기를 뱉어낸다. 뿜어져 나간 연기가 눈구름 같아. 그것이 흐릿해져 공기와 동회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으니 그가 손짓한다. 그 손짓에 나른한 몸을 일으켜 다가가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타 뒤덮히면 만족스러운 얼굴의 그가 물고 있던 시가를 빼고 그대로 뒷머리를 잡아당긴다. 씁쓸한 담배맛에 한껏 취해 녹아내리면 나의 뺨을 쓸어내리며 특유의 시니컬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내리게 해볼까, 눈."
사방으로 흩날리는 새하얀 가루. 눈보다 훨씬 고운 입자이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내리지 않는 이 나라에 정말 어울리는 아름다운 광경. 모두가 새하얀 가루에 넋이 팔려 하늘을 올려다봐. 큰소리로 외치고 눈물을 터트려. 무릎을 꿇고 절규하는 외침은 기쁨의 환호성과도 닯아있어. 절망으로 흘리는 눈물은 감동과 기쁨의 눈물과도 흡사하지. 과정이 어떠하든, 속내가 어떠하든. 결과가 그리 비치면 그만이야. 눈도 비도 내리지 않는 나라에 일어난 작은 기적. 모든 사람들을 환호시키고 춤추게 하는 그것은 댄스 파우더. 국민들의 환호성(아우성)을 바라보며 웃자, 춤추자. 이제 조금만 있으면 불꽃 축제도 볼 수 있을거야.
크로커다일
6. 눈이 내리지 않는 나라
작은새 님, 작은새 님. 어디로 가나요?
작은새 님, 작은새 님. 나의 길잡이, 나의 사랑스러운 지침. 언제나 사랑스러운 작은새 는, 오늘도 자유로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네요.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은걸까,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몸짓이 가엾기 그지 없네요. 새하얗고 창백한 얼굴이 안타까워 견딜수가 없어요. 지금 당장 달려가서 꼭 안아주고 싶어요. 내 체온을 전해주면 조금은 그 새하얀 안색에 붉은 혈색이 돌아올까요? 꽉 껴안아주면 벌벌 떨리는 그 몸이 안정될까요? 그렇지만 나의 작은새 는 겁이 너무도 많으니까, 내가 나타나면 도망가버릴지도 모르겠네요. 포르르 날아가버릴거야. 그렇다면 나는 작은새 를 붙잡아야 해요. 나에게서 도망갔으니 벌을 주지 않으면. 그렇지만 작은새 를 잡아 내려치는건, 작은새 를 아프게 하는 일이니까 가급적 하고싶지 않아요. 작은새 가 그걸 알아주면 좋은데, 무심한 작은새 는 그걸 알아주지 않거든요.
작은새 님, 작은새 님,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나요?
작은새 님을 만난건 내가 길을 잃고 헤메고 있을 때였어요. 남들과 벌어지는 격차, 점점 즐거움을 잃어가는 동료, 오만해지는 자신.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는 검은 어둠 속에서 절망하고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을 때 작은 손을 내밀어준건 바로 작은새 였어요. 그 뿐만이 아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혼자서 헤메이지 않도록 단단히 이끌어주었어요, 작은새 는. 사랑스러운 작은새. 당신은 내가 길을 잃지 않게, 그 험한 길을 앞서 나가 나를 지탱해주던 작은새 랍니다. 네, 그래요. 비록 당신이 전혀 아무것도 기억하지를 못해도.
그래도 괜찮습니다. 제가 전부 기억하고 있어요. 작은새 와 우연히 부딧혔을 때, 작은새 하고 우연히 말을 나누었을 때, 작은새 의 말에 내가 제멋대로 구원받았을 때도, 전부. 그러니까 괜찮아요. 작은새 가 나를 모르고 있어도 나는 작은새 를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요. 당신이 우연히 말을 건대고 응원해준 한 남자가 당신에게 사랑을 했다는 단순하고 단순한 이야기.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그저 지금처럼, 이전처럼, 나의 작은새 로 있어주면 되는거예요. 나를 이끌어주어야 하니까요, 다른 남자따위 필요 없죠? 그렇죠? 작은새 는 나를 기다려주는데 바쁘니까, 그걸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제가 처리해버릴게요. 그게 설령 당신이라고 해도, 나는 나의 이상의 작은새 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게요. 약간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해해줄거라고 믿고 있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작은새 는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있으면 됩니다. 내가 멋대로 행동하고, 내가 멋대로 구원받을테니까요.
작은새 님, 작은새 님, 오늘도 나를 이끌어주세요.
키세 료타
7. 작은새가 인도해준 길
구두 를 선물하는데에는 헤어지자는 의미가 담겨 있대요. 잡지를 보며 중얼거린 내 말을 들으며 당신은 살며시 웃었어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렇게 이야기하던 당신은 나의 손에 당신의 손을 겹쳐올리고, 뺨에 키스해주며 말헀죠. 나와 같은 길을 걸어주세요, 라는 뜻도 있거든. 언제나 같이, 같은 길을,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걷고 싶다는 의미였을텐데, 어째서 헤어져 달라는 전혀 상반된 뜻을 가지고 있을까, 처음에는 알지 못헀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알 것 같네요.
"좋은 구두 를 신으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대."
...그렇다면 당신이 구두 를 신고 가게 될 좋은 곳은 아마 나를 볼 수 없는 곳일거예요. 나를 떠나, 저 멀리 멀리, 내 손이 닿지 않고, 내 발이 닿지 않고, 내 눈이 닿지 않는 그런 먼 곳이요. 분명히 장담할 수 있어요. 나와 같이 있는 이 장소는 당신에게 있어 결코 좋은 곳이 아니니까요.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고, 당신의 뒤에서 남몰래 뒷공작을 하고 있는걸. 당신이 모르는 곳에서 당신이 서 있을 만한 곳들을 차례차례 무너트리고 망가트리고 있어요. 당신이 아무데도 갈 수 없도록. 내 옆 이외에 당신이 있을 자리가 없도록. 모든 선택지를 배제시켜버리는 내 옆이, 당신에게 있어서 결코 좋은 곳은 아니겠지요. 나에게 있어 당신의 곁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지만, 당신에게 있어 나의 곁은 당신을 망가트리는 끔찍한 곳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구두 를 선물하는건, 그런 뜻이 되는거예요.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지만 결국 자신의 행복에 눈이 팔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 그러니 내 곁은 절대 좋은 곳이 아냐, 너를 불행하게 하고, 눈물 흘리게 만들고, 외롭게 하는 불행한 곳. 그러니까 나를 떠나가세요. 구두 를 신고 나에게서 도망쳐주세요. 나를 동정하지 말고, 나를 뒤돌아보지 말고, 당신의 행복을 위해 멀리멀리 자유롭게 날아가주세요. 분명히 그런 뜻이 담겨져 있을겁니다.
그러니 이 구두 에 담는 것은 행복이 아닌 저주,
당신에게 선물하는 구두 는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예요. 같은 길을 걸어달라는 것도, 나에게서 도망쳐달라는 것도,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길 바라는 것도 아니야. 아마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이기적이기 때문에, 당신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물이 아닌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선물을 준비해요.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당신의 행복이 무엇인지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나의 행복을 위해, 나의 마음을 위해 당신을 나에게 묶어두기 위한 구두 를 보내요. 심장을 꺼내어 쥐어짜낸 피를 새하얀 구두 에 떨어트리자. 붉디 붉게 물든 구두 가 몇번이고 몇번이고 피를 머금어내고, 이윽고 더이상 피를 담아내지 못하게 되고 검게 검게 굳어져버리면 당신에게 이 구두 를 보내요. 이것은 강하디 강한 집착을 담은 더러운 저주. 당신이 이 구두 를 신고 어디를 가던, 마지막에는 나의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그것은 강하고 깊은, 지독히도 잔인한 저주.
키세 료타
14. 검은 구두
나는 파란색 이 좋아했어. 파란색 은 하늘의 색이거든. 파란색 은 날개가 달려 있지만 날 수 없는 우리 일족이 평생을 동경해 온 하늘의 색. 절대 사람의 손에 닿지 않고, 절대 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자유롭고 넓은 하늘. 우리는 그 하늘이 너무나도 좋았어. 사실 좋아하던 일족도 있었고, 싫어하던 일족도 있었지만 결국 모두가 하늘을 좋아했을거야. 그 감정이 동경인지, 애정인지, 애증인지 그 표현의 차이만이 있었을 뿐.
나는 하늘의 파란색 을 좋아했어.
그래서 나는 내 방의 물건들을 파란색 으로 채워나갔어. 파란색 물컵, 파란색 시계, 파란색 공책, 파란색 볼펜, 파란색 슬리퍼. 방의 모든 것들을 파란색 으로 빼곡히 채워나갔지만 하늘에 닿을 수는 없었어. 너무나도 초초했다. 하늘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있고 싶었어, 하늘을 손에 넣고 싶었어, 하늘이 되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파란색 옷을 입기 시작했어.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 드넓고 자애로운 하늘에 조금이라도 닮고 싶어서 입기 시작한 파란색. 나는 파란색 을 좋아했어. 그리고 너는 내 파란색 옷을 보고서 잘 어울린다고 해 주었지. 내 새하얗고 폭신폭신해 보이는 머리카락이 하늘에 떠 있는 작은 뭉게구름 같아보인다고, 깨끗하고 잘 어울리는 색이라고 칭찬해주었어.
...그래서 나는 파란색 이 더 좋아졌어.
서로 같은 색이라며 멋쩍은 듯 웃던 네가 입고 온 파란색 원피스는 너무나도 반짝였어. 그렇게 닮고 싶었던 하늘이, 지금 바로 내 눈 앞에 서 있었어. 하늘의 색은 너에게 아주 잘 어울렸어.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작은 새 처럼 너는 예쁘게 웃었어. 그 파란색 이 너무나도 유혹적이고, 탐이 나서 견딜수가 없었어. 목이 바짝바짝 마르고 눈 앞이 아찔해졌어. 지금이라면 하늘에 닿을 수 있어. 그토록 원하던 하늘을 손에 넣을 수 있어. 그 하나의 생각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떨어지지 않았어. 사랑하는 너, 사랑하는 파란색, 사랑하는 하늘. 그것이 가지고 싶고 가지고 싶어서, 미칠듯이 원해서. 그래서 단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손을 뻗었어. 하늘을─ 가지기 위해.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파란색 작은 새가 하늘 위로 도망치기 위해 발버둥 쳤다는 것밖에 희미하게 남아있지 않아. 내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하늘이 너무 야속해서, 하늘을 가지고 있는 파란색 작은 새가 나를 두려워 하는 것이 미칠듯 싫어서, 그 날개를 부러트렸어. 날아가지 못하도록 날개를 잘라내고, 도망가지 못하도록 다리를 분질렀어. 나를 쳐다보지 않는 그 가녀린 목을 비틀었어.
...그리고 너의 얼굴은 새파란 하늘의 색 이 되었어.
그렇지만 내가 손에 넣은 하늘은, 너와 나는 황혼의 색 이 되어버렸어.
이호
25. 파란색 나비, 파란색 장미, 파란색 하늘, 빨간 나.
달려. 절대 뒤돌아보면 안돼. 알고 있을까? 알고 있을거야. 그렇지만 너는 믿지 않았겠지. 그런것 따위 그냥 우스갯소리일 뿐이야. 시시껄렁한 헛소리일 뿐이야. 그렇게 믿고 있었을거야. 그래,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거의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 가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 따위. 진심으로 믿을 사람이 없잖아. 믿고 있는 누군가가 있다고 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고 있지 않고 있어. 그것이 이루어질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그러니까 안심하고 있었을거야. 너와 같이. 그렇지만 그 상식은 이곳에서만 통할 뿐이야. 평행세계 를 알고 있니? 만약, IF, 가정으로 분기해 나간 수많은 세계를 알고 있니? 그 중 어느 세계에서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비상식이 상식인 세계가 하나쯤 있을거란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을까? 없을지도 모르겠네. 너의 세계에서 이곳은 그야말로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일이니까. 그렇지만 이런, 안됐네. 저쪽 세계에서는 이것이 상식이고 당연한 일인 것 같네. 그곳이 어디냐고? 글쎄, 나도 알지 못하는걸. 그런거 알고 있을리가 없잖아, 바보같이. 그렇지만 이건 확실히 알 수 있어. 넌 지금 계속해서 도망가야 한다는거야. 뒤돌아보지마. 붙잡히는 순간 게임은 끝나버릴거야. 그곳은 미친 세상이야. 사람을 죽이는 것이 합법화되어 있고,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평범하게 살아있는 곳이야. 인간을 먹고 진화하는 생명체도 있고, 5t쯤 되는 무게는 무게도 아닌 것처럼 취급하는 사람들이 널려있지. 원하는 것을 빼앗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어떤 잔학무도한 짓도 거리끼지 않는 그런 미쳐버린 세상이야. 그리고 그 미쳐버린 세상에서 너와 닮은 여자아이가 살고 있었어. 착하고, 상냥했던 모양이야. 그리고 그녀를 통해 진심으로 치유받은 한 사람이 있었어. 진부한 동화 같지만,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가 않네. 왜냐고? 그녀가 죽어버렸거든. 누군가의 인생의 버팀목이 되는, 삶의 기둥이 되는, 남은 인생의 전부인 그녀가 죽어버렸어. 그래서 그는 미쳐버렸지. 그래서 원한거야. 새로운 그녀를. 너는 그녀가 아니야? 아하하. 과연 어떨까나. 그녀는 너와 꼭 닮았거든. 이른바 도플갱어, 라고 하는거야. 뭐, 너는 생각하지 못했겠지만. 그래서 네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아. 그에게 있어 너는 그녀니까. 다른 세계에서, 자신과 만나지 않았던, 또다른 그녀. 그게 바로 너야. 그러니까 돌아보면 안돼. 바로 달려나가. 그렇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붉은 눈의 사신이 너를 잡으러 올거야. 뒤돌아보지마, 계속해서 달려. 안심해서는 안돼. 철컹하는 사슬 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순간 게임은 끝이 나버리니까. 이런, 그렇게 충고했는데 결국 잡혀버렸구나. 그럼 안녕. 크라피카 44. 이중으로 걷는 자 도플갱어
오늘은 당신에게 고백을 받았어요. 접점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서로 알고 지내지도 못하는 사이의 당신. 복도를 걸어가던 나의 팔을 붙잡고는, 당신은 약간 화가 난 듯한 말투로 방과후 체육관 뒤로 오라고 말했어요. 오지 않으면 키무라네 트럭으로 쳐버릴거야. 그렇게 말하는 당신의 귀가 새빨개서, 갑자기 불려서 놀란 것도 잊고 살풋 웃어버렸어요. 나보다 훨씬 커서 올려다 보아야 하는 큰 덩치가 그때만큼은 왠지 작고 귀여워보였다고 말하면 당신은 이번엔 파인애플을 던지겠다고 할까요? 당신의 후배에게 늘 말하는 것처럼. 체육관 뒤뜰에 가면 당신은 먼저 기다리고 있었어요. 조금 있으면 연습을 가야하는 지 유니폼 차림으로 와서는 어쩔 줄 모르고 안절부절하는 모습이 정말 당신 답지가 않았어요. 그렇지만 그것이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던게 사실이예요. 어색하고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이 왠지 뿌듯하고 기분이 좋았어. 그렇게 생각했어요. 마주 본 나를 향해 당신은 몇번이고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말을 꺼내는 것을 주저했습니다. 괜히 하늘을 보기도 하고, 날씨가 좋네, 같은 딴소리를 꺼내기도 하고, 괜히 신발로 바닥을 툭툭 치기도 하고.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 것을 체육관 벽쪽에서 당신의 동료들이 지켜보고 있었어요. 그들을 완전히 등진 당신은 보이지 않았겠지만, 까만 머리의 남자애가 주먹을 불끈 쥐어버리며 얼른 해버리라고! 하고 말하고 싶은 답답한 얼굴로 녹색 머리의 남자애에게 매달리고 있었어요. 녹색 머리의 남자아인 이상한 물건을 들고 있었고요. 오하아사 전갈자리의 아이템. 그러고보니 오늘은 전갈자리가 1등이였었죠. 멍하니 생각했어요. 그런데 녹색머리 남자아이는 게자리가 아니였던가. 어째서 전갈자리 아이템을 들고 있는걸까. 고개를 갸웃거릴 때 쯤 그가 갑자기 어깨를 잡아왔습니다. "좋아한다. 결혼하자." 네? 나도 굳고, 당신도 굳고, 뒤에서 구경하던 당신의 동료들도 굳어버린 충격적인 발언이였습니다. 당황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아니, 그게 아니라, 하고 어떻게든 해명할 말을 찾아 허둥대는 당신을 보다 못한 뒤의 동료가 배를 잡고 웃으며 쓰러질 정도로, 당신은 당신답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런 당신의 모습에 기뻐하고 있는 내가 있었습니다. 좋아해요.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그렇게 고하는 나에게 진심으로 환한 웃음을 짓는 당신을 보면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시계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 또, 꿈..." 이루어질 리 없는 망상. 지난번은 해가 지는 빈 교실 안에서였습니다. 지지난번은 내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던 집 앞이였습니다. 그 전에도, 그 전에도. 장소만 다를 뿐, 변하지 않는 꿈의 내용. 현실과의 경계가 모호한,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망상속 공간에 틀어박혀서, 나는 오늘도 꿈을 꿉니다. 이 세상은 나만의 순결한 세상 이 세상은 나만을 데리고 가는 세상 이 세상은 나만의 고독한 이야기 살아가는 것이 서투른 내가 만들어 낸 세상 미야지 키요시 83. 공중정원
당신은 나에게 있어 빛이였습니다.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그림자로 칭하고는 했습니다. 주모받지 않는, 어둡고 눈에 띄지 않을. 새까맣고 더러운, 빛을 돋보이게 하는 그런 소모품. 빛을 더욱 빛나게 만드는 도구. 그렇게 당신은 스스로를 칭하고 있었지만, 제게 있어 당신은 그림자가 아니였습니다. 단 하나뿐인 빛. 그것이 내가 보는 당신이였습니다.
당신은 너무나도 상냥한 사람이였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재능이 없더라도 계속해서 노력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이 전혀 돋보이지 않았지만 그렇게라도 코트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모두와 함께 뒬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는 순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렇게 다짐하면서 노력과 노력을 계속해서 조금씩 쌓아올려가던 멋진 사람이였습니다. 무심하지만 친절하고, 매정하지만 착실한, 그런 어둠을, 그림자를 연기하는 가장 빛나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림자를 청하는 당신은 빛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저는 사랑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였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존경, 경의, 광애, 숭배. 그것은 우상을 올려다 보듯, 왕을 경배하듯, 신을 갈망하듯. 그러한 사랑이였습니다. 네, 나는 아마 당신을 사랑했던게 아니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그림자를 청하는 당신에게 사랑을 했던 것입니다. 아마 당신이 평범하게 농구에 재능이 있었다면, 그림자가 아닌 일반 선수였다면, 평범한 당신에게 나는 반하지 않았을 테지요. 당신이 농구에 재능이 없었기 때문에, 그림자로밖에 있을 수 없기에, 그런 당신이었기에 저는 사랑을 한 것입니다. 이는 분명 제대로 된 사랑은 아니겠지요. 그렇지만 상관 없었습니다. 형태가 어찌되었던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 사실만이 중요 했으니까요.
당신은 나의 신이였고, 나는 당신의 신자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착각이었습니다. 그것을 꺠달았을 때에는 당신이 사라졌을 때였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과거의 동료들. 승리밖에 남지 않은 황무지. 스포츠가 아닌 어린이의 유희. 그러한 농구를 하게 된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당신의 눈빛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영원히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그 잔인한 현실에서 당신이 농구부를 빠져나가고, 그런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활용될 일이 없는 그림자로서, 다른 어둠 속에 녹아내렸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아름답고 성스러워서, 나는 당신의 슬픔을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깨달았던 것입니다.
나의 사랑의 이상함에. 미쳐버린 이 감정에.
영원히 계속 될 줄 알았던 영원은 존재하지 않아. 그는 중학교 졸업 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농구가 아예 없는 학교로 가서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절망했더라도 그는 강한 사람이고, 어찌할 수 없을만큼 농구를 좋아했습니다. 그는 결코 농구를 손에 놓지 않겠지요. 다른 재능있는 사람을 만나서 그를 빛으로 세우고 있을겁니다. 새로운 그림자가 되어서, 그들에게 맞설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생각해보았습니다만, 가슴은 뛰지 않았습니다. 한번 주인을 잃은 그림자가 다시 그림자가 되어 그 빛을 볼 수 있다고 속삭이는데도, 전혀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아아, 신이시여. 어찌 저에게 이런 비극을.
나는 '당신' 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는 나' 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였습니다.
완전한 착각 속에서, 나는 신을 사랑하는 신자를 연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쿠로코 테츠야
99. 신을 사랑한 이에게 내린 비극
'Dream'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엔노리리] 神隠し (1) | 2016.12.25 |
|---|---|
| [夢/多] 그릴비루차 (0) | 2016.03.18 |
| [夢/에바/카오루] 썩어버린 사과와 멈추지 않는 시계와 세계 종말과 너와 나 (0) | 2016.03.12 |
| [夢] 19일의 금요일 (0) | 2016.02.25 |
| [夢/스가리리+이츠] White Tulip (0) | 2016.02.24 |